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 마리 형제새 (문단 편집) === 해석 4 === 네 마리 새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은유적으로 시행될 필요가 있다. 네마리의 새는 각각 눈물, 피, 물, 독약을 마신다. 이것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작중 설명에서 눈물은 사람이 흘린 슬픔. 피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배경을 볼 때 물과 독약 역시도 사람(정확히는 4종류의 선민종족)과 관련이 되어 있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물과 독약은 피와 눈물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피와 눈물은 사람이 내놓는 것이지만, 물과 독약은 사람이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과 독약은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여기서 잠시 피와 눈물의 예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피와 눈물은 각각 상징하는 것이 있다. 피는 사람 몸에서 나오는 소중한 것. 눈물은 몸에서 나오는 가장 해로운 것이다. 이런 형식에 맞춰서, 물이나 독약을 '사람이 마시는 어떠한 것' 이라고 생각해보자. 사람이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될까? 갈증이 해소되면서 생기가 돌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독을 마시면 어떻게 될까? 아프거나 죽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독을 먹은 결과 사람이 나을 수도 있다. 독은 다른 식으로 보면 약이고, 세상 모든 약은 과용하면 독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독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물은 사람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라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실제로 유료도로당의 보좌관 케이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든 스며드는 물은 무엇으로든 변하지요. 피가 섞이면 핏물이 되고, 독이 섞이면 독물로 변합니다."] 물은 아무리 마셔도 사람에 맞게 스스로 바뀌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은유적인 해석으로 돌아가보자. 물은 '사람이 마시면 어떠한 것' 이다. 이 '어떠한 것'에 무엇을 채워넣을 수 있을까? 물이 사람에게 들어가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볼 때, 물은 '사람이 마셨을 때 사람에 맞춰 변화하는 것' 이다. 그에 대응하는 독은 '사람이 마시면 자신에 맞춰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일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마시는 새는 어떻게 될까? 물이 마시는 대상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물을 마시는 새는 아무런 변화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오롯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것이다. 반대로 독을 마시는 새는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독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춰 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느리게 날며, 독을 마시는 새가 가장 빠르게 난다는 말에 대한 해석도 가능하다. 물을 마시는 새는 변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장도 가장 느릴 것이다. 하지만 독을 마시는 새는 계속해서 변화하며 따라서 성장도 가장 빠를 것이다. 작중 후반부에 케이건이 한 말 역시 해석이 가능하다. 케이건은 물에 독을 풀어 세상에 퍼트린다고 했다. 물(변화하지 않는 사람)에 독(변화)를 넣어 뿌리는 것으로 멈춰있던 세상이 다시금 변화하도록 만든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한가지 우려를 표할지도 모른다. 물과 독의 또다른 특성들, 즉 물은 잠든 사람을 깨울 정도로 날카롭고, 독은 사람을 깊이 잠재울 정도로 부드럽다는 서술에 대한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 말이다. 이에 대해서 해석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잠을 꼭 죽음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잘때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될 수 있다. 즉 독은 사람을 잠으로 초대하고, 잠은 꿈(무수한 변화)를 부른다. 그러나 물을 끼얽으면 우리는 꿈 속의 무수히 변했던 자신에서 변하지 않는 현실속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물이 날카롭다고 해서 그게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현실이 때론 더 날카로우니까. 반대로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부드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쨋든 사람의 꿈은 지금 현재에서 더 변화하는 것이다. 또한 물을 마시는 새와 독을 마시는 새를 인간에게 비유하면 물을 마시는 새는 고집이 센 사람이고 독약을 마시는 새는 유연성이 있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눈물을 마시는 새는 남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사람이고, 피를 마시는 새는 남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 사람이다. 즉 해석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네마리 형재 세 이야기는 종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람의 성질, 즉 착함과 유연함을 이용해서 사람을 구별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눈물을 마시는 새는 모든 이를 위해 희생하는 자이다. 가장 큰 예로는 대호왕 사모 페이가 있을 것이다. 피를 마시는 새는 남의 희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대표적으로 제국이 있다. 물을 마시는 새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찾지 않고 자기에게 물들여지는 것만 찾는 사람이다. 즉, 변화를 거부하는 자이며,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만을 찾는 자이다. 눈마새에서는 비아스 마케로우가 그러했으며, 피마새에서는 스카리 빌파, 그리고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의미에서 엘시 에더리가 그렇다. 마지막으로 독을 마시는 새는 자기를 죽여가면서까지 꿈을 꾸려는 자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찾는 자, 삶을 시련으로 만드려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삶이 보람차고 편안하다. 현실의 꿈이든 잠 속의 꿈이든 그것은 인간의 삶을 충족시켜준다. 꿈을 향해 돌진하기에 가장 빠른 이러한 이들의 대표는 삶을 시련으로 만든 아실, 실패를 쫒는 제이한 등이 있다.] 실제로 작중에는 이러한 사람들은 종족에 관계 없이 등장한다. 남의 슬픔을 치유하는 사람(눈물을 마시는 새)으로서 사모 페이가 등장하고, 남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연명하는 사람(피를 마시는 새)으로 케이건 드라카와 비아스 마케로우가 등장한다. 나가 수호자들 또한 전쟁을 통해 지배욕을 충족시키려는 모습에서 피를 마시는 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을 마시는 새는 바뀌는 세상에 뒤쳐지는 사람들, 혹은 수백년간 변하지 않은 네 종족 전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독약을 마시는 새는 그런 세상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나가 수호자들은 피를 마시는 새임에도 불구하고 독약을 마시는 새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물로 비형을 씻어낸 티나한 역시 물 대신 독약을 선택한 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피를 마시는 새보다 더 좋은 것이 아니며, 독을 마시는 새가 물을 마시는 새보다 더 좋은 새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지만 가장 아름답게 운다. 하지만 케이건 드라카가 말했듯, 눈물을 마시는 새가 눈물을 다 마셔버리면 사람은 비정해져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부작용이다. 피를 마시는 새는 누구보다 오래 살지만 피비린내가 난다. 피비린내가 난다고 해서 단순하게 나쁘다고 해석해선 안된다. 삶에 있어서 폭력과 피는 드문일이 아니다[* 도깨비들은 폭력과 피를 두려워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피를 마시는 새에서 정우가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서 가장 큰 폭력(페시론 섬의 재앙)을 행한 선민종족은 인간도 레콘도 나가도 아닌 도깨비이다. 도깨비 역시 폭력을 사용할 줄 안다. 다만 사용하기를 극도로 꺼릴 뿐.].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신인 시우쇠는 자기들이 사람을 만들 때 다른 사람을 죽여야 살 수 있는 생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확대 해석한다면 피를 마시는 새는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이는 확대해석이지만, 그렇다고 살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무작정 나쁜 일로 모는 것 역시 지양해야할 태도일 것이다. 물을 마시는 새와 독을 마시는 새 역시 그렇다. 해석자는 먼저 해석자가 쓴 것처럼 물을 마시는 것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며, 독을 마시는 것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본인의 주장을 전제하겠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변화는 무조건 옳은 일인가?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세상은 천년간 변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신들이 나서야 할 정도였다. 이때 변화는 분명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의 이야기인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아실은 분리주의를 주장하며 레콘은 레콘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지키멜 퍼스는 왕국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변화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너무 강하다.[* 그렇다고 올바르다는 말도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논리는 없다.] 변화는 파괴를 전제로 한다. 새로운 체제의 긍정에는 이전 체제에 대한 부정이 선행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파괴되어서는 안될 것들도 존재한다. [[문화대혁명|오래된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발상으로 일어난 사태]]를 잘 알 것이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물을 마셔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해석자가 본 해석에 몆가지 새로 깨달은 점들을 추가하겠다. 각 액체에는 그에 맞는 특성이 있다. 눈물은 해로워서 몸에서 내보내는 액체, 피는 소중하기에 몸에 가둬두는 액체이다. 앞선 해석에 따라 물은 주변에 맞춰 변화하는 액체이며, 독은 주변을 변화시키는 액체이라고 생각해보자. 각 액체는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며, 특히나 선민종족들 각자가 결핍되어있는 마음을 의미한다. 눈물이 상징하는 것은 슬픔에 대한 공감이다. 동정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가는 작품 내내 이성적이라고 묘사된다. 눈물은 나가에게 결핍되어있고, 나가가 극복해야 할 액체이다. 나가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올바르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자를 차별하지 않으며 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한 사모 페이는 나가의 한계를 넘어선 인물이다. 그 사모 페이가 요스비의 제자였다는 점을 볼 때, 사모 페이 또한 여신이 만든 가짜 엿가락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겠다. 피가 상징하는 것은 폭력성이다. 피를 흘리는 쪽이 될지, 흐르게 할 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피를 흐르게 하는 쪽이 되게 하는 마음. 이 마음이 부족한 종족은 당연히 도깨비이다. 도깨비는 피를 극복해야 한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의 폭력을 행사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탈해 머리돌이 그렇게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다. 이제 물과 독이 남았다. 여기서는 각 액체에 대한 해설과 상징성을 같이 분석한다. 물이 상징하는 것은 사회성이다. 물은 주변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킨다. 독의 곁에서 독이 되고, 피의 곁에서 피가 된다. 주변의 환경에 휩쓸리기에 물은 사회성이다. 하지만 물은 가장 날카롭기도 하다. 사회성이 좋은 사람은 어떤 집단에서도 부드럽게 융화된다. 또한 미리니름이 되지만, 잠을 자는 사람은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우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확인한다. 관련된 고사가 이미 작중에 나와있다. 바로 "보늬와 나늬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면 충분하다." 라는 말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보늬와 나늬를 구별하기 위해서는(꿈에서 깨기 위해서는)한 사람으로는 부족하고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물은 사회성이다. 사회성이 부족한 종족은? 두말할 것 없이 레콘이다. 자신만의 숙원이 중요하고 주변따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닌 그들에게 필요한것은 사회성이다. 그리고 레콘은 상당히 많은 수의 레콘이 물을 극복했는데,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가진 인연이다. 지멘은 아실을 지키기 위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것으로 물을 극복했다. 힌치오는 사라티본 부대를 안전하게 후퇴시키기 위해 공수증의 광기에서 벗어났다. 나늬가 있다는 믿음으로 물을 극복한 쵸지가 신을 상대하는 세마리 레콘 중 하나로 선택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쵸지의 숙원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연결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종류이다. 물이 사회성을 뜻한다는 점이 더더욱 확실한 이유이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주는 무기들이 개인맞춤에서 동일 규격으로 바뀌고 있다는 변화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이란? 독은 꿈꾸는 마음이다. 독은 사람을 편안한 꿈 속으로 빠트린다.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나늬인것 처럼, 인간에게는 이상(꿈)이 필요하다. 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선민종족은 인간만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레콘은 납병을 하기 전까지 영원한 전사이며, 숙원을 추구하거나 신부를 얻기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레콘은 죽는것 보다도 한 방울의 물을 더 두려워한다. 나가는 심장적출을 통해 거의 불사신의 몸을 얻었다. 이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쉽게 죽지 않는 몸을 가졌기에 인간만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깨비는 아예 논외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냥 두번째 삶으로의 출발이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크게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번성하는 생물이 되었다. 사냥감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인간은 곡물을 키우게 되었다. 곡물은 보존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곡물을 키운 덕분에 그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엄청나게 불어난 만큼 더 많은 땅과 곡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유재산이 생겨나고, 곡물을 독점하려는 인간이 생겨나 수많은 갈등이 발생했고, 수많은 죽고싶지 않은 이유가 생겨나 인간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선민종족은 인간이며, 그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얼음에 뒵싸인 북해에서 밀림인 키보렌에까지 그들은 존재한다. 마치 그들의 신인 바람처럼.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해 큰 도전을 꺼리게 되었다. 나랏님이 바뀌든 말든 자기 삶을 살면 그만인 인간들의 모습은 가장 돌출되어보이는 예시일 뿐이다. 그들의 특징은 소설에서는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글에서는 수많은 도전적인 사람들이 나타나고 수많은 바보들이 나타나지만, 그들은 수많은 인간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글에서조차 조명되지 않는 평범한 인간들이 인간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냥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 특별히 부각되지 않는 인간들. 그래서 모든 선민종족들의 평범함의 기준이 되지만, 그것이 전부인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마치 그들의 신인 바람처럼. 이렇듯, 인간이 극복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평범함이다. 독은 사람을 꿈으로 이끄는 것이며, 꿈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평범함을 벗어던진다. 그 안에서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잠을 자는 꿈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꾸는 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꿈을 꿀 때 현실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언가를 강하게 바라며 살아갈 때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음은 찾아오리라는 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꿈은 때로 현실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단 한명의 인간이라도 그가 꿈에 취해있다면, 그 인간이 바라보는 여자는 나늬가 될 수 있다. 그 여자가 아무리 추녀라도 꿈 속에서 그녀는 나늬이며, 그는 그 꿈 속에서 편안하다. 독이란 꿈이다. 그러나 꿈은 그 안에서 편안할 지언정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눈마새의 제왕병자들이다. 꿈을 꾸는 그들은 주변에서 바보 취급을 받고,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하직하는 경우가 많다. 꿈을 가지고 인생을 시련으로 만들었다가 자신을 파괴시킨 아실이 그러할 것이고,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삶을 실패로 꾸미게 되어버린 제이어 솔한이 그렇다. 락토 빌파 또한 비슷하다. 락토 빌파는 북부인이 황제가 된 제국을 꿈꾸었으며, 그것을 추구했으나 동시에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자포자기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태도는 원시제의 "삶은 실패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라는 격언과 동일한 태도이다. 그리고 그 결과 락토는 죽었다. 스카리에게 습격당해 죽었고, 그렇지만 않았다면 완전한 성공을 이루었을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발케네공으로 만족했다면 그렇게 일찍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꿈을 꾸는 것은 자신을 실패로 몰아가는 일이다. 모든 실패한 사람은 그 전까지는 성공했던 사람이므로. 그리고 거대한 실패는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꿈을 세상에 풀때마다 화상이 돌아오는 정우는 그것을 상징한다. 이상을 바라는 것 만큼 자살에 가까운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은 이상을 바래야 한다. 꿈을 꿔야 한다. 자신의 평범함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에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눈물, 피, 물, 독약은 각자 선민종족에게 부족한 마음을 가리켰다. 동정심, 폭력성, 사회성. 그리고 꿈꾸는 마음. 각 선민종족이 그것들을 가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한계를 넘을 수 있다. 한계를 넘어 그들은 흘러내리고, 줄어들고, 쪼개질 수 있다. 물을 극복한 레콘이 될 수 있으며, 피를 극복한 도깨비가 될 수 있으며, 한계선 너머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나가가 될 수 있으며, 영원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인간이 될 수 있다.죽은 체 싸웠다고 알려진 괄하이드 규리하처럼. 삶을 실패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통하는 말이지만, 모든 선민종족에게도 비슷하게 통용된다. 실패하는 자는 그 전까지는 성공하는 사람이다.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존재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실패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그 의미는 실패를 추구하라기보다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원시제가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이며, 그것이 이영도 작가의 메세지라고 해석자는 판단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